11월 3주 좋은시
빨래를 개키는 여자 김승희 불길한 주황빛 노을이 날개를 접고 지상에 저녁이 내린다 텔레비전에서는 하루치의 나쁜 뉴스가 뜨거운 국처럼 끓어 넘치고 여자의 치마 아래엔 죽은 닭들의 시체, 방사능 묻은 시멘트 폐기물, 폐타이어, 머리가 깨진 지구본이 묻혀 있다, 지구본의 금 사이로, 석류 즙 같은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난민들은 푸른 파도 아래 침몰한다,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은 열린 창문 앞에서 한 여인이 빨래를 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 똑같은 삶의 폭력과 파괴에 젖어서도 저녁마다 나쁜 뉴스를 보며 치마 아래에 돌아버린 문명의 황폐한 쓰레기를 품고 열린 창문 앞에서 오염을 문지르고 보푸라기나 실밥을 뜯으며 조용히 빨래를 개키는 한 여인이 있다 손이 뜨거운 다리미가 된 듯 다독이고 쓰다듬어서 하얀 와이셔츠나 청바지나 블라우스나 팬티나 손수건을 눈부시게 펴서 나란히 개키고 있는 여인의 손은 쓸쓸한 노동의 손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비탄의 깊은 낙관주의 지금 어느 해변 가에는 등대가 켜지겠지 열린 창문 앞에서 한 여인이 빨래를 개키고 있기 때문에 사랑은 오직 가난하고 위급한 때 오기 때문에
⸺계간 《시와 정신》 2019년 가을호 ----------- 김승희 / 1952년 光州 출생.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