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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妙有 李應鎬 2019. 7. 15. 19:11
7월 3주 좋은시 손택수 나뭇잎이 흔들릴 때

7월 3주 좋은시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멀리 여행을 갈 처지는 못 되고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 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 생을 함께 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계간 《문예연구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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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