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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요한 성당 터키

妙有 李應鎬 2020. 3. 13. 10:04

비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패배시키고(BC 334년) 에페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불타버린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에페소 시민들은 자력으로 신전을 복구하기를 원하였으며 알렉산더대왕의 제안을 외교적으로 거절하였다. "신(알렉산더 대왕을 지칭하는 말)이 다른 신의 신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이유였다.하나 남아있는 돌기둥 뒤 언덕위에 성 요한 성당이 보인다.左측은 이슬람사원이다.



2.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 규모
-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에페소 여자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귀금속을 다 바쳤다. 재건된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아테네(Athens)의 파르테논(Pharthenon) 신전보다 4배가 큰 규모였다. 즉 길이는 약 130m, 넓이는 약 70m, 높이 20m, 또한 20m에 달하는 127개의 이오니아식기둥이 신전을 둘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BC 7세기에 창건되고 BC 6세기, BC 4세기에 재건되었다. AD 265년에 또다시 재건 된 신전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지위를 굳힘으로써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에페 소에 성 요한 성당을 짓고 또 콘스탄티노플에 성 소피아 성당을 지을 때,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헐 서 건축자재로 사용함으로써 신전은 깡그리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은 비가 오면 늪지대로 변하는 저지대에
돌기둥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다.

▶ 성 요한 성당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당신의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고 한다. (요한 19,
 26-27).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옮겨와서 지금의 에페소 시내 성모성당 터에서 살았고 죽어서는 에페소 뒷산에 묻혔다고 하는데, 요한이 묻힌 곳에 4세기에 목조성당을 지었고,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527~565년) 돌과 붉은 벽돌로대성당을 세웠다.

십자형 성당 한복판, 대리석 기둥 네개가 있는 곳이 요한 사도의 무덤이라고 한다. 에페소, 베르가모, 필라델피아 등지에는 비잔틴 시대에 요한 성당 이 세워진 반면 바울로 성당은 전혀 없다. 이는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바울로보다 요한의 영향력이 컸다는 증거라 한다.



3. 박해의 문 -
이 문은 성 요한 성당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부분을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저온 것인데,맹수와 검투사들이 결투를 즐기던 3~4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 들은 이 경기장에서 맹수들의 제물 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몰려가서 그 대리석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의도는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1967년 7월 26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곳을 방문하여 기념 미사를 하고, 공식 성지로 선포되었다.



4. 성 요한 성당(측면)



5. 성 요한 성당(내부) - 앞쪽에 제대가 보인다.



6. 성 요한 성당의 제대 - 제대 밑에 성 요한의 무덤이 있다.



7. 사제들의 성찬 준비방



8. 장례 미사시 관을 놓아두는 관대



9. 침례(浸禮)당 -
초대교회의 세례는 온몸을 다 물에 담그는 침례였으며, 가운데 통로에 물을 채워놓고 세례 받는 사람은 한쪽(서쪽)으로 들어와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앉아 온 몸을 물에 담근 후 일어나 다른쪽(동쪽) 으로 걸어 나갔다.



10. 성 요한 성당 모형



11. 성 요한 성당 뒷언덕에서 내려다 본 성당 전경



12. 성요한 성당 북쪽 언덕 꼭대기에있는 고성은 6세기 비잔틴 시대에 처음 지어젔으며,
셀축 시대에 개축되었다.현재는 폐쇄 상태임.

사랑과
사랑과 평화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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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el Laudate pueri Dominum (Salmo 112) per Soprano, Coro e Orchestra HWV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