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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Cluny) - 개혁과 수구

妙有 李應鎬 2020. 3. 9. 08:08
클뤼니(Cluny) - 개혁과 수구



클뤼니(Cluny) - 개혁과 수구

보 엉 보졸레를 떠나서 보졸레 지방 한 가운데를 간다. 사실 여행 계획 중 어느 곳을 들러야 할 지 가장 고심한 곳이 무스티에 생트마리를 출발해서 베즐레까지 가는 길이었다. 파리의 숙소인 Air BNB를 일찍 예약한 탓에 파리의 입성 날짜는 미리 정해 놓아서 니스 쯤 부터는 그 날짜로부터 역산해서 여행 스케쥴을 잡아 놓아서 무조건 거기에 맞추어야 했다. 가 보고 싶었던 곳 중에서 포기를 한 곳이 샤모니와 몽블랑, 제네바, 본느, 디종, 오를레앙 등이다.

상파뉴지방은 아예 원래부터 제외했었고 알사스 로렌 지방은 언젠가 독일 여행을 할 기회가 있을 때 가보려고 ;제외했었다. 그곳을 다 넣으려면 두 주간 정도는 더 넣어야 될 것 같아서였다. 클뤼니라는 곳을 넣은 이유가 있다. 한때 세계최대의 성당 건물이었다고 하는 클뤼니 수도원을 보기 위해서였고, 이 클뤼니 수도원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수도사 생활을 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바티칸의 성바오로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인데 그보다 몇백 년 전,;중세 카톨릭교회의 타락은 바로 클뤼니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카톨릭이 점점 세속화되면서 성직의 매매, 사제들의 결혼 등, 부패상이 커져가고 있을 때 복종, 청빈, 정결의 정신을 강조했던 수도원들의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클뤼니수도원이 그개혁의 중심에 선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은 서유럽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수도원의 개혁정신에 공감하여 성직매매를 강하게 비판하고 교회의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카톨릭의 역사에 대해서 깊게 논할 실력이 없어서 이만 줄이되 세계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들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 사이에 교황권과 황제권의 충돌이 빚어낸 카놋사의 굴욕,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주창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카놋사의 굴욕에 대해서는 내가 독일의 슈파이어대성당에서 하인리히 4세의 무덤을 보고 쓴 글을 인용한다. '특히 세계사에서 배웠던 카놋사의 굴욕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를 이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역사의 현장에 서게된 감회가 새로웠다. *카놋사의 굴욕.. 1077년 1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중세 서양사에서 황제권과 교황권의 충돌로 일어난 사건이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회의 쇄신책의 하나로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이어져 오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의한 독일지역의 주교 서임을 부정하고 주교의 서임권은 교황의 권한임을 선언하였다.

이에 반발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황제의 권한도 신이 내린 것이므로 이에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1076년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에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누구도 황제를 접촉하지 못하도록 했다. 잇단 제후들의 교황진영으로의 이탈로 인해폐위의 위기에 몰린 하인리히4세는 슈파이어를 출발하여 이탈리아 북부의 카놋사성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을 찾아가서 눈밭에서 얇은 옷을 입고 맨발로 사흘 밤낮을 서서 빈 결과 교황의 용서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하며 중세 교황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용서를 받아 사면된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반대 쪽에 있던 제후들을 하나씩 제압하여 황제권을 회복하고 로마를 침공,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고 대신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옹립하게 된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의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아래 사진 왼쪽이 하인리히4세의 석관 - 독일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찍음)



그레고리우스 7세와 우르바누스 2세를 언급하는 이유가 이 두 사람이 카톨릭 개혁운동의 산실이었던 바로 이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입구를 들어가면...



수도원의 회랑이 보인다.



아래 모형의 검은 부분은 지금 없어진 부분이고 회색 부분이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이다. 클뤼니수도원 성당은 16세기, 바티칸의 성 바오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 까지는 세계 최대의 성당 건물이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부분만 보면 없어진 부분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클뤼니수도원 출신인 교황 그레그리우스 7세를 축출하고 클레멘스 3세를 교황(대립교황)으로 옹립하였다. 한편, 그레고리우스 7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빅토르 3세가 6개월 만에 선종하자 역시 클뤼니수도원 출신인 우르바누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088).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갔으며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의 결성을 주창하여 1095년 1차 십자군이 원정하게 된다. 1097년 십자군을 이용하여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로마에서 몰아낸다. 위에서 보듯이 중세의 대사건인 카놋사의 굴욕, 십자군 전쟁, 클뤼니수도원은 사건으로, 인물로 서로 깊게 얽혀 있는 것이다. 아래 연대표 1095년, 바로 1차 십자군이 출정한 해, 우르바노스 2세가 새 수도원 성당의 성가대석을 헌당하였다.





910이라고 쓴 것이 아마 910년 이 수도원이 최초로 세워지던 910년에 관한 기사인 모양이다.



1798년. 파괴된 수도원 성당의 그림이다. 왜 성당이 파괴되었는가? 클뤼니 수도원이 개혁의 중심이 되고 그 세력이 점점 확대되어 나가면서 한때 산하에 1500여 수도원을 거느리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게 된다. 1088년 부터 1130년에 걸쳐 완성된 수도원 성당의 규모도 길이가 182미터에 달하는 대규모 성당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면서 어느새 기득권을 가진 성당으로 되고 오히려 개혁을 저지하는 곳이 되어버렸다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 위그노 전쟁,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혁명세력과 민중에 의해서 성당은 대대적으로 파괴되었고 그 결과가 오늘 날 보이는 부분만 남게 된 것이다.



개혁을 부르짖다가 막상 권력을 잡고 나면 권력의 맛에 도취하여 타락하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도 수구의 탈을 쓰게 되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개혁이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와 슬로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리셜리외 문... 이하 설명은 줄인다...































이 거대한 주춧돌들이 있는 곳이 파괴된 3차 성당이다.























































































































중세의 대사건들과 클루니수도원... 깊은 지식이 없이 겉만 핥고 가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다. 이제 예수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했던 막달라마리아의 유해(골)이 있다는 베즐레 성당으로 달려 가야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자,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기도 한 베즐레(V?zlay)로 간다.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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