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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불의 항거했던 유대교 예언자 "아모스

妙有 李應鎬 2017. 9. 30. 21:14







사회 불의 항거했던 유대교 예언자 "아모스"

사회 불의 항거했던 유대교 예언자

유대교의 예언자 전통 확립했던 성직자

지배층 죄악 낱낱이 열거하며 심판 경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 ·형식적 제물 거부
하느님의 사랑 예언했던 호세아와 대조




하느님의 사랑 예언했던 호세아와 대조

아모스의 초상화.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를 헤매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예수’와 같은 이름이다)의 인도로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가나안으로 들어가, 이미 살고 있던 민족들과의 유혈전쟁 등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다. 유대교 경전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물론 그들의 신 야훼의 직접적인 진두지휘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살았다. 처음 200년간은 열두 지파를 통괄해서 다스리는 왕이 없이, 주변 민족이 침입해 오면 그때그때 임시로 지도자를 선출하여 적을 물리쳤는데, 이때의 지도자들을 ‘사사(師士, Judges)’라 하였다. 우리에게 ‘삼손과 딜라일라’로 잘 알려진 삼손도 이런 사사들 중 한 명이었다. 북미 호텔에 가면 방마다 ‘기드온 클럽’에서 제공한 성경이 비치되어 있는데, 기드온도 유명한 사사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이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하여 ‘기름부음을 받아’ 선출된 최초의 왕이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성공하지 못한 왕이었다. 그를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 남쪽 베들레헴 출신의 목동으로 적군의 대장 골리앗을 돌팔매로 죽인 다윗이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를 수도로 정하는 등 왕권을 튼튼히 했다.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의 제위 기간(기원전 1000-961)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다윗의 후계자를 놓고 ‘왕자의 난’이 있었지만, 그가 사랑하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난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등 아버지에게서 물러 받은 부에 힘입어 ‘솔로몬의 영광’을 구가하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실정으로 인해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게 했다. 결국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북쪽 열 지파로 구성된 ‘북방 이스라엘’과 유다와 벤야민 두 지파로 이루어진 ‘남방 유다’ 둘로 갈라지게 되고 말았다. 북방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당하고, 아시리아의 인구분산정책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이른바 ‘잃어버린 지파(lost tribes)’가 되었다. 남방 유다도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침입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이를 ‘바빌론 포로(Babylonian exile)’라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반세기 정도 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정책에 따라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 유대인들을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남방 유다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직업적인 예언자 학교가 있었다. 이런 학교를 거쳐서 된 예언자는 한국으로 치면 세습무(世襲巫)와 맞먹는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중요시하는 예언자는 모두 ‘야훼 신이 내게 임하시매’라는 영적 체험을 통해 예언자가 된 사람들이다. 강신무(降神巫)나 접신무(接神巫)에 가까운 사람들인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예언자(預言者)’는 앞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언’의 예는 ‘미리 예(豫)’가 아니라 ‘맡길 예(預)’가 더 정확하다. 옛날에는 ‘선지자(先知者)’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강하여 현재 별로 쓰지 않는다.물론 왕권의 출현 전에도 모세나 사무엘 같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권력층이 등장하면서는 예언자들이 주로 권력의 남용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다윗 왕이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까지 전쟁에서 죽게 하자, 예언자 나단이 그에게 가서 그 죄를 지적한 것과 같다. 특히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의 출현, 그들의 멸망 전후해서 이런 식으로 부패한 정치권력이나 종교 권력의 횡포, 이에 부화뇌동하는 사회를 고발하고 질책하는 예언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이런 예언자들 중 기록을 남긴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유대교 경전에는 이른바 4명의 ‘대예언자’와 12명의 ‘소예언자’의 기록이 남아 있다. 예언자들의 지위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이름으로 된 기록의 분량이 크냐 작으냐 하는데 따른 분류이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예언자 몇 명을 든다면 포로기 이전의 아모스(기원전 750년경), 호세아(기원전 740년경), 제1이사야(기원전 742-690년경), 예레미야(기원전600년경), 그리고 포로 기간 중의 에스겔, 제2이사야 등이 있다. 아모스는 이런 예언자들 중 시간적으로도 제일 처음일 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된 기록을 남김으로 유대교의 예언자적 전통을 확립한 예언자라는 점에서 예언자들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아모스서』는 그 시적 문학성에서나 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헌에 속한다. 이제 그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모스는, 「아모스서」에 의하면, 남방 유다 왕 웃시야 시대, 북방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의 사람이라고 한다(1:1). 그는 남방 유다에 속하는 예루살렘 남쪽 드고아라고 하는 곳에서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 일하고 있었다(7:14). (새번역에서는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으로 되었다. 팔레스타인에는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뽕나무가 없기에 뽕나무를 돌무화과 나무로 옮긴 모양이이다. 신약성경에 삭개오가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보러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그 나무도 사실은 뽕나무일 수 없다.)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었던’ 그가 하루는 양떼를 몰다가 야훼로부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예언하라.”는 명을 받았다. 남방 유다 출신이 북방 이스라엘로 간다는 것이 좀 이상스럽지만, 야훼에게는 남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백성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 당시 북방 이스라엘은 전쟁 위협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부자 상인 계급이 출현하고 그들이 축적한 부를 권력층과 나누어 가졌다. 신흥 부호들은 자기들의 호화로운 집을 짓고 장원을 꾸미기 위해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로 인해 농부들은 농토를 잃게 되었다. 자연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빈부 차이가 격심해졌다. 잘 사는 이들은 자기들의 부함이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내리신 특별한 축복이라 여기고 더 큰 축복을 빌기 위해 제물(祭物)을 가지고 베델과 길갈에 있던 야훼의 성전을 찾았다. 성전에 있던 제사장들과 직업적인 예언자들은 이런 부자들이 갖다 바치는 제물에 팔려 이들 기득권자들의 불의와 횡포를 보고도 모른 척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모스는 베델로 올라가 야훼신의 대변자로 외치기 시작했다.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2:6) 그러고는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파는’(2:8) 등 이스라엘 지배층이 저지른 죄악상을 낱낱이 열거하고,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것은 나 주가 너희에게 내리는 심판의 말이다.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모든 족속에게 내가 선언한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3:1-2)고 경고한다. 선택받은 민족이지만 인권을 무시하는 등 악행을 할 때는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아모스는 무엇보다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를 강조했다. 부정직한 재판관, 부패한 상인들, 직무유기한 종교 지도자가 판치는 사회를 향해 ‘화있을진저’를 선언한다. 정의를 짓밟고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형식적 종교행사나 제물은 모두 야훼신에게 역겨울 뿐이라고 역설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고 이어서 아모스의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5:21-24)하는 말을 소리 높이 외친다.

물론 아모스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의를 회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곧 동쪽으로부터 오는 침입자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등 하느님의 임박한 심판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리려는 것이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5:4, 14)하는 하느님의 약속을 말하고 있다. 흔히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는 아모스를 아모스 다음에 나와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예언자 호세아와 대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아모스도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염려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모스가 종교적인 것보다 사회 정의나 인권 같은 윤리적 차원만 강조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기별은 일차적으로 잘못된 신관이나 안일한 신앙 형태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는 신이 우리가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라도 그저 헌금이나 많이 하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계속 복을 내려주시리라 믿는 믿음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준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모스가 이렇게 예언자로 사회의 불의에 항거한 것이 바로 그 자신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거나 자기 속에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감지하는 깊은 종교적 체험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아모스가 강조하는 윤리적 기별은 이처럼 깊은 종교적 체험과 혜안에 뿌리박은 나무에서만 가능한 아름다운 결실인 셈이다.아모스를 비롯한 예언자 전통은 후에 예수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예수님도 사회의 버림 받은 자, 소외된 자, 약자들의 편에 서서 가진 자들의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위선적 종교를 배격했다. 오늘 한국 종교계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아모스의 출현이 기다려진다고 하면 잘못일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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