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노자를 만나러 갔다.
제자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노자와 독대를 했다.
공자는 위의를 바로하고 질문을 했다.
“선생께서는 인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자 가로되
“인격은 비인격적일 때 인격을 운위하는 법이라오”
공자가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는 윤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자 답하여 가로되
“윤리란 비윤리적일 때 윤리를 말하는 법이요”
공자의 일방적인 KO패다.
공자의 가르침이 학생들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고
줄을 바로 세우려고 애를 쓰는 것이라면 노자는
가만 두어도 걸을 때 되면 걷고 밥 먹을 때 되면 밥 먹으니
간섭 말고 놓아주라는 것이 아닌가.
공자에게는 인격이나 윤리가 중요하지만 노자는 그것을 뛰어넘는다.
선악은 공존한다. 이분법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몇년 전 노자의 고향인 몽성을 찾아간 일이 있다.
노자의 탄생처인 태청궁에는 노자상은 물론이고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문안을 드렸다는 問禮亭이 있다.
정자 안에 ‘孔子向禮像이 있는데
노자와 공자가 담론하는 조상이 있다.
공자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노자는 둘째 손가락을 들고 뭔가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노자의 그 손가락에 반창고가 감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천안문 사건 때 많은 공자상이 훼손된 것으로 짐작컨데,
공자에게 설법하는 노자가 못마땅한 공자의 광신도가
손가락을 훼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쓸 데 없는 것이 소중한가?
노자는 ‘무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 살이 한 개의 수레바퀴 통으로 모아져 있는데,
그 중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굴대가 끼워져 수레는 쓰일 수가 있게 된다.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그릇은 쓰임새가 생기게 된다.
문과 창을 내어 집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써 집은 쓰임새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이롭게 쓰이게 되는 것은,
없는 것의 쓰임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商容은 노자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뜨려하자 노자가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청했다.
상용이 물었다.
“혀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알겠느냐?”
노자가 대답했다.
“강한 것은 없어지고 부드러운 것은 남는다는 말씀이시군요”
노자의 柔弱謙下, 부드러움과 낮춤의 철학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강한 것은 남을 부수지만 결국은 제가 먼저 깨지고 만다.
부드러움이라야 오래 간다.
어떤 충격도 부드러움의 완충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썩지 않으려면 흘러라. 툭 터진 생각, 변화를 읽어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강한 것을 물리치는 힘은 부드럽게 낮추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 했다.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문학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