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별별다방을 통해 바라본 노년은
결코 평화롭지 않습니다.
맞서 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빈곤, 질병, 고독을 다 물리친다 해도,
마지막 강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익숙한 관념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은 것들,
마땅하고도 옳다고 배운 것들,
평생 기대해 온 것들을 마음에서
물리쳐야 합니다.
노인의 배려와 이해는 알고 보면
눈물겨운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세상과의 아름다운 작별을 위한
노력입니다.
홍여사 드림
나이 먹으니 잘 안 되는 것들.
'거짓말'도 그중 하나인가 봅니다.
둘째 딸과 통화를 하다가 무심코
비밀을 탄로 내고 말았네요.
어디냐고 묻기에, '퇴원할 때
받은 약이 떨어져 병원 왔다'
했지 뭡니까.
딸이 깜짝 놀라 묻습니다.
"엄마 언제 입원했었어?"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죠.
저는 순순히 털어놓았습니다.
얼마 전 열이 나서 병원을
찾았다가 신우염 소리를 듣고
입원해서 며칠 치료받고
나왔다고요.
그런 줄은 너만 알고 있으라고
했더니 딸이 버럭 화를 냅니다.
엄마는 왜 자꾸 자식들을
불효자로 만들어? 왜~?
하지만 아마 제 나이쯤 된
독거 부모들은
다 이해하실 겁니다.
바쁘게 사는 자식들에게 아프다
소리 하기가 매번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열 일 제쳐 놓고 달려오면
미안해 죽겠고,
바빠서 못 오면 자식이
미안해하는 게 또 싫습니다.
아무도 오지 마라 해놓고도
정말 안 오면 슬그머니
서운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고요.
그래서 어지간하면
혼자 앓고 말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오한이 겹치는 걸 보니
영락없는 감기다 싶어 단골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병명은
급성신우염 대수롭지 않은
정도이지만 며칠 입원해서
치료받아야 한다더군요.
하는 수 없이 입원
절차를 밟았죠.
자식들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았습니다.
수족이 불편한 것도 아니고
정신이 흐린 것도 아닌데
지금 당장 '보호자'가
꼭 필요할까요?
내가 나 자신의 보호자가
되자 결심했죠.
배정받은 병실에는 저 말고
두 사람이 더 들어 있었습니다.
한 분은 구순 가까운 노인으로
내내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저와
동년배의 여성으로,
심심하던 차에 잘 만났다는
듯 저한테 관심을 보이더군요.
병명이며 나이며 이것저것 묻고
자꾸 말을 거는데,
일일이 대꾸하기엔 제 몸
상태가 따라주지 않아,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며 이불 쓰고
끙끙 앓아대기 시작했죠.
그렇게 이틀을 주사 맞으며
앓고 나니 열이 좀 떨어지며
두통이 잦아들더군요.
휴대전화를 열어 보니
딸들에게서 메시지가
여러 통 들어와 있습니다.
제 딴에는 요령껏 둘러댔죠.
전화기가 고장 나서 통화가
안 된 거라고,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요.
그러고는 일어나 앉아
주위를 돌아보니,
제 또래 환자가 부산스레
환자복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그 곁에서 젊은 여자분이
거들고 있고요.
닮은 데가 별로 없기에
며느리인가 했는데,
환자가 짜증을 버럭버럭
내기에 친딸인가 보다 했습니다.
소리칠 기운 있는 거 보니 다
나았나 보다 했죠.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환자가
저를 건너다보며 한마디 묻네요.
"애들 없어요?"
"?"
"여태 아무도 안 오기에….
며느리 없어요? 딸도 없고?"
그 순간 저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웬걸요 셋이나 있어요 하면,
제 자식들을 불효자 취급하며
혀를 찰 게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있는 자식을 없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요.
순간 은근히 부아가 치밀더군요.
"애들 없어요?"
소리를 어쩌면 그렇게
쉽게 할까요.
하지만 날을 세워 되받아칠
배짱도 없는 저는그저
바른대로 말하고 말았습니다.
"멀리들 살아요.
일부러 얘기 안 했어요."
제 말에 그 환자는 뜻 모를
한숨을 후유 내쉬더군요.
보나 마나 뻔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나는 괜찮다고, 이건 내
나름의 배려일 뿐이라고 해도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태세였습니다.
'복'이 많은지 '힘'이 센지
모를 그녀는 그로부터 이틀을
더 있다가 퇴원했습니다.
그 사이에 자식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누구 하나는
꼭 곁에서 수발을 들더군요.
저런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
나 홀로 입원을 결심했건만,
그 들 곁에서 조금 초라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배려심과 참을성 말고도,
줏대까지 있어야 나 홀로
노년을 씩씩하게 꾸려 갈 수
있는데,저한테는 그게
없나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길들여진 생각,
눈에 익숙한 풍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전의 칠십 노인은 정말
노인이었죠.
자식에게 의탁하고 손자
재롱이나 보는….
세상이 바뀐 줄 알면서도
그런 생각에 젖어 있네요.
하지만 그녀가 부럽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듭니다.
타인에 대한 매너가 그러한데,
과연 진심 어린 효도를
받고 있을까요?
물론 여우의 신포도 같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요.
그나저나 전화기 너머의
화난 둘째 딸이 항상 하는 말을
또 하네요.
하여간 오늘 내가 갈게,
엄마 뭐 사다 줄까?
하지만 저는 절대
오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실은 퇴원하던 날,
구순의 어르신과
단둘이 잠깐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어른이 저한테 남기신
말씀이 있거든요.
"잘했어. 자식들 오라 가라
하지 말아요.
칠십이면 아직 새댁이구먼.
그런데 그것도 내 나이 되면
어쩔 수 없어.
자식한테 폐 안 끼칠 수가 없지."
그쯤에서 어르신은 잠시 숨을
고르시더군요.
힘에 부치시나 했는데
알고 보니 타이밍을
고르고 계셨던 겁니다.
며느리가 잠깐 밖으로
나가자 남겨뒀던
말씀을 마저 하시더군요.
'근래에 내가 제일
신경 쓰는 건,
어느 한 자식한테 부담이
쏠리지 않게 하는 거라우.
착한 놈, 정 많은 놈,
가까이 사는 놈만
고생하지 않도록 말이우.'
그분의 말씀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습니다.
배려하고 살피는 부모
노릇이란 평생 끝이
없는 일이구나 싶어서요.
앞으로는 나도 우리
둘째 딸부터 되도록
멀리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귀 따갑게 잔소리하면서도
달려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우리 둘째.
그런데 그 딸이 또 저를
들여다보러 온다 하니, 참….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조선일보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