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이전부터 무학 대사와 인연이 깊었다.
태조는 왕이 된 이후에도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무학 대사를 찾아가곤 했다.
어느 날 태조가 오랜만에 무학 대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대사에게 농담을 던졌다.
“스님은 꼭 돼지같이 생겼습니다.”
무학 대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부처님처럼 생겼습니다.”
이성계는 자신이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지만
스님께 지나친 농담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저는 스님을 돼지에 비유했는데, 어찌 스님께서는
제게 부처님처럼 생겼다고 칭찬하십니까?”
무학 대사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무학 대사의 방어전에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단순한 대화이지만,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무학 대사는 부처 마음만 품고 있으니
세속의 왕도 부처님처럼 보는 것이요,
대왕은 늘 돼지처럼 탐욕스럽게 살다보니
청정한 승려도 돼지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에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즉 “같은 물이라도 천인(天人)은 보석으로 장식된 연못이라고 보고,
인간은 단지 물로 보며,
아귀는 피(혈血)로 보고,
물고기는 자신이 사는 주처(住處)로 여긴다.”
는 뜻이다.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보는 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보는 데는 자신의 견해대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자신의 잣대대로 상대방을 저울질한다.
즉 자신이 탐욕심 많은 심보로
세상을 살아가니 상대방도 자기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으로 보는 것이요,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을 바라보면
모든 이들이 부처님처럼 보이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방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남을 꾸짖고 비난 잘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런 결점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결점을 볼 수 있다.
남을 비방하고 꾸짖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격문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자신조차도 늘 하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반면 존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존경한다면
자신조차도 존경받는 사람, 존중을 받게 된다.
티벳 스님들 중에는 둥근 어깨가
마치 꼽추처럼 앞으로 굽어 있는 이들이 많다.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고개와 어깨를 숙이는 일이 수십년을 하다보니,
자연히 어깨가 앞으로 굳어진 탓이라는 것이다.
고승들은 마치 누가 더 낮은 자세로 인사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경쟁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이 몸과 언어로 표현됨이요,
자연스럽게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우러나오기까지는
성품을 어떻게 키우며 바른 관점을 갖기 위해 노력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