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단풍은 신이 물감 아끼지 않고 그린 명수채화이다(50cut)//글,사진 ─ 송재하 님
<백양사 단풍은 신이 물감 아끼지 않고 그려놓은 명수채화다>
백양사 =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에 있는 절
촬영일 = 2010년 11월 10일
60년대 초 우연한 기회로 백양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때만해도, 어디 구경을 간다는 것은 그 때의 사회분위기가
인정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난하여 살기 힘든 때이기 때문이다, 그 때 동네 노인들의 이야기로는 여기서 속리산이
100리인데 평생에 속리산을 가보지를 않으면 죽어서 염라대왕이 속리산에 가보았느냐고 물어본다는 말이 있는 것을
들어보았다, 그런데 죄가 있는 사람은 사천왕상 앞을 지나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어떻든 백양사를 가본다는 것은
큰 용기요, 큰 문제였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새벽 4시 차를 탔는데 통행금지 문제로 역전에 있는 여관에서 새우잠으로
날을 새운 것 같다, 정읍까지 가려고 광주행 기차를 탔는데 역마다 쉬는 기차가 출발을 언제 하는지도 모르고
시간표도 없다, 전주에 오니 차장의 유성 안내가 전주에서 2시간을 쉰다는 것이다, 역 밖에 있는 시내에 나가 점심을
먹고 정읍에 도착한 것은 밤중이다. 버스를 타고 백양사에 가지 와서 여관이라는 것이 초가집이다. 밥만 사먹으면
잠은 공짜로 재워주는 곳이다, 아침에 일어나 산골물에 세수하고 차려주는 밥을 먹은 다음 지금은 상상도 못할 좁은
길을 오르니 떡 장수와 비자나무 열매장사가 있는데 비자나무 열매는 회충구제용으로 대인기였다.
피 보다 더 빨간 단풍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도 깜작 놀랐다. 단풍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풍을 어디가나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백양사에서 내장사로 가는 길은 이야기 듣기로는 좁고 험한 길 아라는데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는 큰 길이 났다, 그 때 후로는 이런저런 형편으로 많이 다녔다. 살다보니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늙은이는 추억에
산다는 말이 이듯이 화려한 단풍에 놀라고 지난 일에 가슴 아픈 것은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기 때문이다.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암산백양사라고 했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고 개명했다.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고,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했는데 이것은 환양의 〈법화경〉 독성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1786년(정조 10) 환성(喚星)이, 1864년(고종 1)에는
도암(道巖)이 중건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극락보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명부전·칠성각· 진영각(眞影閣)·보선각·설선당
(說禪堂)·선실(禪室)·요사채·범종각 등이 있다. 이밖에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太能)의 소요대사부도(逍遙大師浮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齋式)이 집전되는데 관조부(觀照部)·전경부(轉經部)·정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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